작년쯤부터 그랬던가? 서울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회사 휴게실 창문에 붙어서 이런 이야기를 서너 번 한 적이 있다. ‘서울에는 이렇게 아파트도 많고 차도 많은데 왜 내 집과 내 차는 없는 걸까?’라는 이야기를. 지난해, 취업과 동시에 서울시민이 되면서 생긴 궁금증이었다. 지방에서 상경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서울에 올라온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월급을 모아봐도 이 도시에서 집 하나 살 돈이 안 되는데 이렇게 커다란 도시에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오묘했다. 지난 25년 동안, 돈이 많으면 좋아하는 돼지고기 대신 한우를 먹고 예쁜 옷 대신 비싼 옷을 살뿐 사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겠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돈이 많으면 2년마다 이사 가지 않아도 되겠구나라는 부러움이 생겼다.
이 도시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비교하게 만든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이지만 한쪽에는 으리으리한 아파트들이 펼쳐져 있고 다른 한쪽에는 무허가 주택들이 있는 곳이 있다.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이러한 풍경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서울 사람들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장맛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나는 카메라를 들고 집 근처 양재천으로 산책을 나갔다. 폭우로가득 찬 양재천과 함께 환하게 빛나는 타워팰리스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안개로 자욱하게 덥힌 모습이 동화 속에 나오는, 보통 사람들은 한 번도 들어가 볼 수 없는 왕이 살고 있는 곳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그런 사진을 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갖곤 양재천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확성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는 내가 목적했던 그 곳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양재천에 다다르자 그 소리의 지원지가 어딘지 알게 되었다. 개포로 북 30길.
오묘한 공간이었다. 범람할 것 같은 양재천을 사이에 두고 한쪽 사람들은 산책을 즐기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한데 둘러앉아 확성기를 켜놓곤 시위를 하고 있었다. 답답한 집에서 나와 산책하는 사람들, 소중한 집에서 떠나고 싶지 않아 문 밖으로 나온 사람들, 이 둘이 공존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서울의 삶은 어떠할까? <서울쥐 시골쥐> 속 시골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맴돌던 시기에 우연히 영화 <돼지의 왕>을 보게 되었고, 영화는 내가 하던 생각들을 더욱 흔들어 놓았다. 잠을 자려 침대에 누웠던 내가 무서워 잠 못 이룰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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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왕>은 다큐멘터리보다 더 현실적인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영화는 우리의 망각 속에 잠들어 있었던 기억들을 다시금 끄집어낸다. 우리가 애써 잊고 있었던 현실들을 스크린 속 애니메이션을 통해 보여준다. 그렇기에 어느 영화보다, 어떤 공포영화보다 무서웠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의 불이 켜지면 영화 속의 이야기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된다. 아무리 무서운 영화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영화관을 나와 친구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웃고 떠들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영화 속 이야기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영화가 끝났다고 영화 속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니었다. 영화가 끝나자, 나는 영화 속 현실을 보고 있던 관객에서 영화 속 현실을 살아가는 등장인물이 된다. 이 영화가 악몽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 나는 자이로드롭에 탄 것 마냥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충분한 제작비가 없어, 혼자 시나리오 작가, 주인공, 영화감독, 1인 3역을 한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이 품앗이를 했다. 수년 전에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그걸 영화로 만들고 싶었지만 제작비가 없어, 1인 제작 체제로 영화를 완성할 수밖에 없었던 연상호 감독을 도왔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품앗이로 어렵게 만들어진 이 영화는 작년 국내 개봉을 했었다. 흥행결과는 말 안 해도 아실 듯하다. 이 글을 통해 이 영화를 알게 되는 분이 많을 것 같으니.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다 보면 항상 드는 의문이 있다. 왕이나 귀족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은 그 시대에 어떻게 살았을까? 교과서 속 역사는 결코 그들의 삶을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어디에서도 영화 <돼지의 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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